• 2022. 8. 15.

    by. 지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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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서울 태평로의 모 은행 지점장으로 재직 중인 손님이 전화를 했다. 오랜만에 점심을 같이 하고 싶다는 반가운 전화였다. 그는 9년 전 내가 근무하던 갤러리에서 진행하던 아카데미 수업을 통해 만난 분이다. 당시 갤러리에서 기획한 그림 컬렉션 가이드 강좌를 여러 차례 수강한, 조용하지만 그림 공부에 열성적인 분이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한 번도 인연이 되지 못했다. 9년 만에 연락을 받으니 우선 반가움과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통화하고 나서 일주일 후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그분이 어렵게 말씀을 꺼냈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의 사진을 한번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처분하고 싶거나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의 가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서다.

    그가 직접 휴대전화로 찍은 소장품 11점의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조용히 사진을 살펴보는 동안 그는 내 표정과 반응을 살피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그림들을 처분해서 결혼하는 아들 집을 구하는 데 보태주고 싶다고 했다. 2007년 아카데미 수업을 들으러 다닐 때 구입한 그림으로 당시 6,000만 원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구입한 금액의 2배에 팔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분의 말씀이 끝나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의미 없이 사진을 반복해 넘기면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고민을 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 중에 되팔 수 있는 그림이 1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의 조언을 받고 이런 그림을 구입했는지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두 예술가의 정성이 느껴지는 귀한 작품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 주변에는 이 작가들의 그림을 찾는 분이 없으세요. 아쉽지만 지점장님께서 그림을 구입하신 갤러리나 딜러에게 팔아달라고 해보시면 어떨까요?"

    내 말의 뉘앙스를 간파하고는 나에게 흥정을 걸던 여유로운 태도는 버리고 바로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여준 그림들은 2005년 그림시장이 한창 호황일 때 그림 투자를 먼저 시작한 친구에게 큐레이터를 소개받아 구입한 그림이었다. 그 큐레이터는 자신이 추천한 그림들은 앞으로 시장에서 뜰 작가들의 그림이니 2~3년만 소장하고 있다가 다시 자신에게 내놓으면 되팔아 큰 돈을 벌 수 있게금 해주겠다며 적극 권했다고 한다. 당시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는 그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그의 조언을 따라 먼저 투자를 시작한 오랜 친구도 확신하기에 추호의 의심 없이 1년여 동안 거금 6,000만 원을 들여 11점의 그림을 구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7년이 흐른 뒤 수익환원 차원에서 그림을 처분하려고 했으나 그림을 추천했던 큐레이터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친구와도 관계가 소원해지고, 자신이 직접 이 작품들은 처분하려고 다른 딜러들을 만나고 다니다 내게 연락했던 것이다.

    "왜 그림을 구입하기 전에 정말 시장성 있는 작가인지 아닌지 크로스 체킹을 하지 않으셨어요. 당시 아카데미 수업을 들으실 때 웬만한 국내 그림시장 전문가들을 다 만나셨는데, 강사분들에게 조언이라도 한 번 구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으셨을 텐데···."

    사실 다수를 대상으로 한 그림시장 강연을 다니다 보면 지점장님과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을 꼭 한두 분 만나게 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림시장에 대한 정보를 잘못 얻고, 잘못 투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자할 만한 작가는 한정적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그림이라고 해서 모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림 투자를 성공으로 이끌어줄, 2차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재거래됨으로써 수익을 안겨줄 작가는 아주 한정적이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주요 경매에서 작품이 거래된 화가의 수는 4,235명으로 전체 예술가의 약 2%에 불과했다. 경매 외에도 시장에서 꾸준히 반복적으로 거래되는 작가, 어는 정도 시장 인지도를 형성하고 있는 작가를 헤아린다면 그 수는 더 적어진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 그림시장에서 블루칩 작가는 물론이려니와 저평가된 유망 작가로 평가되는 작가까지 합쳐 최대한 헤아려도 1,000명이 넘지 않으리라고 추정한다. 재테크가 목적이라면, 이미 시장에서 어느 정도 거래 기록이 쌓인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한다. 특히 2차 시장에서 반복 거래되는 작가들을 주목해야 한다. 시장에서 이유 없이 급상승을 보이는 예술가의 작품은 없다.

    국내 그림시장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선택의 폭이 넓은 해외 그림시장에서도 반복적으로 재거래되는 작가는 한정적이다. 그림시장의 정보를 제공하는 아트뉴스의 자회사인 스케이츠에서 전 세계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 1만 점을 조사했다. 그 분석 자료(2015년 2월 기준)를 살펴보면, 1만 점에 해당하는 예술가는 단지 1,066명이었고, 그 중 한 번 이상 반복 거래된 작가는 592명, 다섯 번 이상 반복 거래된 작가는 311명에 불과했다. 

    온라인 미술정보 사이트 아트프라이스닷컴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아트프라이스 랭킹 500'도 이와 비슷한 통계를 보여준다. '아트프라이스 랭킹 500'은 주요 경매회사의 경매 낙찰 기록을 바탕으로 해마다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가 500명의 순위를 발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마다 새롭게 순위에 올라오는 예술가들도 있지만, 300여 명의 작가가 반복적으로 이름을 올린다는 점이다. 다만, 순위에 변동은 있다. 

    물론 스케이츠의 분석 결과나 아트프라이스 랭킹이 그림 투자를 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가 될 수는 없다. 각 조사기관이 내놓는 작가 순위가 어떤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한 것인지, 어떤 측면에 비중을 두고 순위를 매긴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사실은 그림시장에서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작가는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컬렉션하는 것은 그림 애호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 그림 투자자의 자유는 아니다. 무엇보다 재테크가 목적이라면 이미 시장에서 반복 거래되는 작가들 선에서 컬렉션을 해야 한다.

    그림시장은 생각보다 작고, 그림 투자를 성공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작가군도 한정적이다. 90%가 예측 가능한 그림시장에서 투자 가능한 작가군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2% 정도다. 이로써 투자 대상의 98%가 걸러진다. 이 한정된 작가군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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